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전투(668년) (문단 편집) === 평양성 함락과 고구려의 멸망 === >총장(總章) 원년(668년) 9월에 적(勣)[* 이세적을 말한다.]이 또 평양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남건(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남건의 밑에서 병사를 총관(總管)하던 승(僧) 신성(信誠)이 비밀리 군중(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城門)을 열고 내응(內應)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서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적(勣)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城)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에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고, 고장(高藏) ·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았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구당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jo&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o_014r_0010_0010_0280&position=-1|동이 열전 고구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던 와중에, [[연남건]]의 심복이자, 군사를 담당했던 승려 ~~땡중~~ 신성이 [[이세적]]과 내통한 것이다. 신성은 이세적에게 협조 의사를 밝혔고, 그로부터 5일후인 10월 21일. 평양성의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자, 그 타이밍에 맞춰 신라의 기병 500기가 성문 안으로 돌파했다. 곧 [[이세적]]이 당군을 투입해 평양 성벽 위로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했다. 평양성은 불길에 휩싸였고,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보장왕]]과 함께 당군에 사로잡힌다. 한때 요동을 호령하고, 중국 대륙과 당당히 맞서던 [[고구려]]가 70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겨울 10월에 대당(大唐)의 대장군(大將軍) 영공(英公)이 [[고구려]]를 쳐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동명성왕|중모왕(仲牟王)]]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천세(千歲) 동안 다스리려고 하였다. 모부인(母夫人)[* [[동명성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말한다.]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하다. 7백 년이 적당하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나라를 잃은 것은 그로부터 7백 년 후의 일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일본서기]]》 권 27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k_0041_0080_0080_0010_0010#self|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